안창호 安昌浩 [1878.11.9~1938.3.10]


독립운동가·교육자. 호는 도산(島山). 남포직할시 출신.

[음양(陰陽)] 陰 陰 陽

[음오행(音五行)] 土 金 土

[자원오행(字源五行)] 木 火 水

[사격(四格)]] 6 + 8 + 11

원격(元格): 19 → 고난격(苦難格)

형격(亨格): 14 → 이산격(離散格)

이격(利格): 17 → 용진격(勇進格)

정격(貞格): 25 → 안전격(安全格)

[총평]

1. 이름자의 의미(자의)

安 편안할 안
昌 창성할, 성할 창
浩 클, 넓게 흐를 호

2. 음양의 배합

陰陰陽이니, 음기와 양기간에 조화를 이루어 어느 한쪽에 치우치지 않으며, 중용의 도를 지키고, 강한 추진력으로 안정된 삶에 주위의 협조가 따라 뜻한 바를 이루는 등 길한 흐름.

3. 순천/역천격

성은 6획이고 이름 첫글자는 8획인 바, 이는 역천격으로서 타인의 말에 따르기 보다는 자신의 의지를 관철하는 경향이 강하고 세상의 법도가 옳지 않다고 판단되면, 법도를 거역하더라도 자신의 판단대로 실행에 옮기는 과단성과 용단성을 지닌 성품.

4. 음오행

음오행은 "土 金 土"로서, 토생금 상생의 흐름을 이루는 매우 좋은 오행임.
"土 金 土"의 오행인 경우, 온화한 성품에 정이 많으며, 주위의 신망(信望)을 얻어 어떤 일을 하더라도 주위의 협조가 따라 순조롭게 성취, 발전하여 뜻한 바를 크게 이루며 특히 명예(名譽)를 드높이는 형상. 심신이 안정되고 건강하여 천수(天壽)를 누릴 수 있으며, 가정운에 있어서도 부모 형제의 덕 속에 유복하게 성장하며, 부부 백년해로하고 가세(家勢)가 중흥하는 길한 흐름.

5. 자원오행

자원오행은 "木 火 水"로서, 목생화 상생과 수극화의 상극이 함께하는 반흉반길의 흐름. 오행이 이와 같은 경우에는 지모탁월하며 강한 활동성, 추진력을 가지고 있어 뜻을 펼쳐 일정한 공과를 거두게 되나, 끝내는 물이 불을 끄는 격으로 상충하여 주위사람의 배신이나 장애가 따르게 되고, 일의 진행에 차질이 발생하여 결실을 얻지 못하고 마는 등의 흉한 암시가 있음.

6. 사격

원격은 고난격(苦難格)으로서 학문에는 성할 수 있으나, 재운이 없으며, 성공을 하더라도 일시적인 성공에 그치고 많은 고난이 있으며, 부모자식간에 이별수가 있다.

형격은 이산격(離散格)으로서 남에 대한 배려가 좋은 성품이나, 자신 스스로는 박약좌절하기 쉽고, 번뇌가 많아 실패로 이어지고, 가정운이 좋지 못한 흉수로서 암울한 상태가 많다.

이격은 용진격(勇進格)으로서 굳은 의지로서 강고히 추진하는 성품으로 대업을 성취할 길수이다. 대외적인 발전이 큰 수리.

정격은 안전격(安全格)으로서 노력을 통하여 자수성가하여 대업을 달성할 길수로서, 재물과 안강다복이 따르는 길수.

7. 이름의 주기

주기에 관해서는 3년주기설, 5년주기설, 9년주기설등이 있으나, 일반적으로는 견해인 9년 주기설을 기준으로 평가해보면, 아래와 같은 흐름임.

<7세~15세> 길

<16세~24세> 흉
1897년 독립협회(獨立協會)에 가입하고 평양에 지부를 설치하기 위한 만민공동회(萬民共同會)를 쾌재정(快哉亭)에서 개최하여 약관의 몸으로 많은 청중에게 감동을 안겨준 연설을 하였다. 훗날 종교가이며 교육자로서 민족의 지도자가 된 이승훈(李昇薰)은 이 연설에 감명을 받고 독립운동의 의지를 굳혔다고 술회할 정도였다. 1899년 고향 강서에 한국 최초로 남녀공학의 점진학교(漸進學校)를 세우는 한편 황무지 개척사업을 벌였고, 앞으로 큰 일을 하기 위해서는 새로운 학문을 더욱 받아들일 필요가 있음을 절감하고 1902년 미국으로 건너갔다.

<25세~33세> 길
샌프란시스코에서 노동을 하면서 초등과정부터 다시 공부를 시작, 이듬해에는 교포들의 권익보호와 생활향상을 위해 한인공동협회(韓人共同協會)를 만들어 《공립신보(共立新報)》를 발간하였다. 그 후 을사조약이 체결되었다는 소식을 듣고 1906년 귀국, 1907년 이갑(李甲) ·양기탁(梁起鐸) ·신채호(申采浩) 등과 함께 항일비밀결사 신민회(新民會)를 조직, 《대한매일신보(大韓每日新報)》를 기관지로 하여 활동을 시작하였다. 대구에 태극서관(太極書館)을 세워 출판사업을 벌이고 평양에 도자기회사를 설립하여 민족산업육성에 힘쓰는 한편 평양에 대성학교(大成學校)를 설립하고 청년학우회(靑年學友會)를 조직하여 민족의 지도자 양성에 힘쓰는 등 다방면의 활동을 전개하였다.

<34세~42세> 흉
그 후 시베리아를 거쳐 미국으로 망명, 1912년 그 곳에서 대한인국민회(大韓人國民會) 중앙총회를 조직하여 초대 총회장에 취임하고, 기관지 《신한민보(新韓民報)》를 창간하였다. ‘105인사건’으로 신민회 ·청년학우회가 해체되자 1913년 흥사단(興士團)을 조직하였다. 3 ·1운동 직후 상하이[上海]로 가서 임시정부 조직에 참가하여 내무총장 ·국무총리대리 ·노동총장 등을 역임하며 《독립신문(獨立新聞)》을 창간하였다.

<43세~51세> 길
1921년 임시정부가 내부분열을 일으키자 이를 수습하지 못한 책임을 지고 물러났고 1923년 상하이에서 열린 국민대표회의(國民代表會議)가 성과를 거두지 못하자 1924년 미국으로 건너가 흥사단 조직을 강화하였다. 1926년 다시 상하이로 가서 흩어진 독립운동단체의 통합을 위해 진력하였으며 독립운동기지를 마련하기 위하여 이상촌(理想村) 건설에 뜻을 두고 이를 추진.

<52세~60세> 흉
일제가 중국침략을 본격화하면서 계획은 실패하고, 1932년 윤봉길(尹奉吉)의 훙커우공원[虹口公園] 폭탄사건으로 일본경찰에 체포되어, 본국으로 송환되었다. 2년 6개월을 복역한 뒤 가출옥하여 휴양 중 동우회(同友會)사건으로 재투옥되고, 1938년 병으로 보석되어 휴양 중 사망하였다.

-대승작명연구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