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주영 鄭周永 [1915.11.25~2001.3.21]


실업가. 강원도 통천(通川) 출생. 전 현대그룹 명예회장.

[음양(陰陽)] 陽 陰 陽

[음오행(音五行)] 金 金 土

[자원오행(字源五行)] 土 水 水

[사격(四格)] 19 + 8 + 5

원격(元格): 13 → 지모격(智謀格)

형격(亨格): 27 → 중단격(中斷格)

이격(利格): 24 → 입신격(立身格)

정격(貞格): 32 → 요행격(僥幸格)

[총평]

1. 이름자의 의미

鄭 나라이름 정
周 두루 주
永 길 영

2. 음양의 배합

陽陰陽이니, 음기와 양기간에 조화를 이루어 어느 한쪽에 치우치지 않으며, 중용의 도를 지키고, 강한 추진력속에 주위의 협조가 따라 뜻한 바를 이루는 등 길한 흐름의 이름임.

3. 순천/역천격

성은 19획이고 이름 첫글자의 획수는 8획인 바, 이는 순천격으로서 순천격은 하늘의 순리에 따른다, 즉 법도, 관습등 일반적인 자연 이치의 흐름을 거역하지 않고, 그 뜻에 따라 순응하며 세상을 살아가는 유순한 성품.

4. 음오행

음오행은 "金 金 土"로서, 土生金의 상생을 이루어 매우 길한 오행임. 이 오행은 총명한 두뇌에 강한 의지와 추진력이 있으며, 대인관계 또한 원만한 성품. 원만하고 곧은 처세와 주위의 협력으로 순조로이 성취, 발전하여, 능히 뜻한 바를 이루어 권위와 재물을 얻을 수 있으며 특히 명예운(名譽運)이 강하여 널리 이름을 떨칠 수 있으며, 가정운에 있어서도 부부화목하며 부자유친(父子有親)하여 안정된 가정을 이끌며, 심신이 건전하고 안정되어 천수(天壽)를 누릴 수 있다.

5. 자원오행

자원오행은 "土 水 水"로서, 토극수 상극하여 흙에 물을 부으면 물이 쉽게 사라지고 없어지는 형상으로, 지혜롭게 강고히 추진하는 성품이나, 일의 진행에 난관이 많고 늘 역경이 도사려져 있으며, 정성을 들려 키운 부하가 배신을 하는 등 자신의 뜻과는 달리, 어려움에 처하게 되며, 중절운으로 일이 자주 막히게 되는 흉운.

6. 사격

원격: 지모격(智謀格) (大吉) 출중한 두뇌, 탁월한 지혜로 어떠한 방면이든 능히 이루어내는 팔방미인(八方美人)형으로 성명학상 최대의 길수. 이 수는 어린 시절부터 탁월한 재능을 발휘하는 경우가 많고 온순한 성품으로 원만한 대인관계를 유지하여 많은 사람의 선망의 대상이 되는 경우가 많다. 특히 이 수는 시대의 흐름을 꿰뚫어 보는 날카로운 안목이 있어, 수많은 난관이 있더라도 능히 극복하고 입신양명(立身揚名)하게 되며, 새로운 환경에 빠른 적응력을 가지고 있고 임기응변에 능하며, 문학, 학습 등 글과 관련된 분야뿐만 아니라 다양한 분야에서 능력을 발휘하는 경우가 많아 그림을 그렸다면 신라시대의 김생이요, 바둑을 두었다면 현대의 조훈현이라고 할 만큼 여러 방면에 남다른 출중함이 있다.

형격: 중단격(中斷格) (凶) 무한한 욕망에 비해 중도에 좌절이 많으며, 파란이 중첩되어 중년실패의 운이 있는 흉수.

이격: 입신격(立身格) (吉) 순조로운 가운데 점진적 성공을 이루어 입신하며, 자손이 번창하며, 평안한 생활과 함께 재물의 운도 있는 길수.

정격: 요행격(僥幸格) (吉) 친화력이 있는 수로서 뜻밖의 행운이 따르는 길운으로 만사형통, 복운과 장수의 운도 함께하는 길수.

7. 이름의 주기

주기에 관해서는 3년주기설, 5년주기설, 9년주기설등이 있으나, 일반적으로는 9년 주기설을 취하므로 9년주기설을 기준으로 평가해보면, 아래와 같은 흐름임.

<5세~13세> 길

<14세~22세> 흉
서당을 다니다 들어간 소학교, 그나마 병으로 휴학도 했었기에 소년 정주영은 열다섯 살이 되어서야 소학교를 졸업. 학교 공부는 늘 상위권이었지만, 돈이 없어 최대의 희망이었던 소학교 선생님이 되는 꿈은 접어야만 했다.
흉년 뒤끝이면 눈오는 긴 겨울을 아침에는 밥을 해먹고, 점심은 굶고, 저녁에는 죽을 쑤어 먹고 지내야 했고, 봄이 되면 양식도 다 떨어져서 그때부터는 풀뿌리나 나무껍질로 초근목피로 끼니를 때우곤 했다.

<23세~31세> 길
1940년. 고향을 떠나 정월의 매서운 바람이 휩쓸고 있는 서울 거리로 다시 돌아온 청년 정주영은 일생을 걸 만한 사업이 무엇일까를 생각하고 지내던 어느 날, 정주영은 인생에 전기를 마련해 준 이를 만나게 된다. 이을학(李乙學) 씨였고, 그는 자동차 수리공장을 해 볼 것을 권했고, 아무리 적은 돈이라 하더라도 남의 공장을 인수할 만한 돈이 없었던 정주영은 얼마 후 이씨와 함께 오윤근 씨를 찾아갔고 정주영의 설명을 들은 그는, 선뜻 3천원이라는 거금을 신용만으로 빌려주었다. 쌀가게를 하면서 쌓았던 정주영의 신용이 빛을 발하는 순간이었다. 그리하여 총 5천 원을 가지고 ‘아도서비스’를 계약했고 후일 거부가 되는 시발점이 되었다.

<32세~40세> 흉
신설동의 ‘아도서비스’ 공장은 정신없이 밀려드는 일감으로 눈코 뜰 새 없이 바쁘게 돌아가면서 돈도 꽤 많이 벌어들였다.
그러나 태평양전쟁의 소용돌이가 거세게 휘몰아치던 1942년 5월, 기업정리령에 의해 공장을 빼앗기다시피 한 정주영은 다시 새로운 일거리를 찾아 떠나게 된다.
1950년 1월, 정주영은 현대토건사와 현대자동차공업사를 합병, 사옥을 필동으로 옮겨 현대건설주식회사로 의욕에 찬 새 출발을 했다. 그러나 그 반년 후 6ㆍ25동란이 터졌고 정주영은 고달픈 피난생활을 하다 다시 부산 거리를 쏘다니며 일거리를 찾는 신세가 되고 말았다.

<41세~49세> 길
1957년 9월, 현대가 한강 인도교 공사를 따내어, 이 공사에서 40퍼센트의 이익을 거둔 현대는, 고령교 복구 공사의 악몽에서 벗어나 건설업체에서 두각을 나타내는 계기를 마련했다.

<50세~58세> 흉
1966년 1월, 현대건설은 월남전이 한창이던 캄란만 군사기지 건설 공사에 참여했다. 이때 예기치 않던 사건이 일어났다. 메콩강 삼각주 하구를 준설하던 미국 준설선 8천 마력짜리 자메이카호가 베트콩이 장치한 폭발물에 의해 침몰당하게 된 것이다. 메콩강 삼각주를 뒤덮고 있는 수풀을 메콩강에서 준설한 토사로 묻는 작업은 월남전에 참전한 미국으로서는 작전상 반드시 필요한 일이었는데, 이 작업을 하던 준설선이 침몰해버린 것이다.

<59세~67세> 길
70년대 현대만의 특유한 공사 관리 방법을 창안해서 중동으로 진출하는데 성공, 최고의 외환보유회사로 성장. 자동차 회사의 성장 및 아산재단의 설립.

<68세~76세> 흉
1980년대. 또다시 군부통치 시대였던 이때, 정주영은 누구보다도 많은 어려움을 겪었다.
우리 경제는 1977년을 기점으로 점점 내리막길을 걷기 시작했다. 정주영은 자기 손으로 일군 기업들을 강제로 빼앗기다시피한 아픔을 겪게 된 것.

<77세~85세> 길
1987년 현대그룹 명예회장이 되어 경영 일선에서 물러난 정주영은 1992년 초(初) 전격적으로 정계 진출을 선언, ‘통일 경제’를 새로운 슬로건으로 내세운 정주영의 정치 참여는 기존 정치권의 세력 다툼으로 일관된 정치 현실에 신선한 바람을 불러 일으켰으며, 이에 따라 창당 3개월만에 치뤄진 국회의원 총선거에서 통일국민당은 31석을 차지하는 성공을 거두기도 했다. 그러나 기존 정치권의 벽을 뚫지 못하고 92년말의 대통령선거에서 패한 정주영은 1993년 국회의원직마저 사퇴하며 정치일선에서 완전히 물러나는 대신, 그동안 주장해 왔던 ‘통일경제관’을 이루기 위한 새로운 구상에 몰입했다. 그것이 바로 금강산 관광사업이다. 이후 금강산 관광사업 및 남북 경협사업에 투신.

<86세~94세> 흉
2001년 3월 21일 87세를 일기로 사망.

-대승작명연구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