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이 李珥 [1536~1584]


조선 중기 학자·정치가. 자는 숙헌(叔獻), 호는 율곡(栗谷)·석담(石潭). 본관은 덕수(德水). 강원도 강릉(江陵) 출생. 아버지는 이원수(李元秀), 어머니는 사임당 신씨(師任堂申氏). 동호문답(東湖問答), 성학집요(聖學輯要)》, 격몽요결(擊蒙要訣) 등 저술.

[음양(陰陽)] 陽 陽

[음오행(音五行)] 土 土

[자원오행(字源五行)] 木 金

[사격(四格)] 7 11

원격(元格): 11 → (吉) 신성격(新成格)

형격(亨格): 18 → (吉) 발전격(發展格)

이격(利格): 7 → (吉) 독립격(獨立格)

정격(貞格): 18 → (吉) 발전격(發展格)

[총평]

1. 이름자의 의미

李 오얏 이(리)
珥 귀엣고리 이

2. 음양의 배합

陽陽이니, 이는 陽의 기운으로만 구성되어 음과 양이 조화를 이루지 못하여 자신의 주장만을 관철하여 한쪽으로 치닫을 수 있는 배합으로서 성명학에서는 흉운의 음양배치.

3. 순천/역천격

성은 7획이고 이름 첫글자의 단자리수는 1획인 바, 이는 순천격으로서 순천격은 하늘의 순리에 따른다, 즉 법도, 관습등 일반적인 자연 이치의 흐름을 거역하지 않고, 그 뜻에 따라 순응하며 세상을 살아가는 유순한 성품.

4. 음오행

음오행은 "土 土"로서, 土의 오행은 어느 것과도 어울릴 수 있는 중성적 성질로서 화합하고 조화를 이루는 기질로서 상생의 길한 흐름을 이루는 이름임. 이 오행은 탁월한 지혜와 재능을 가지고 있으며, 추진력이 강하고 책임감이 강하여 안정된 기초운에 순조로운 가운데 성공의 운이 따르고, 처세가 원만하여 명예와 권위(權威)를 얻을 수 있고, 가정운에 있어서는 부부 일심동체(一心同體)로서 가세(家勢)가 중흥하며 대내외적으로 안락하고 부귀장수(富貴長壽)하는 길한 흐름임.

5. 자원오행

자원오행은 "木 金"으로서, 금극목 상극하여, 쇠가 나무를 치는 격으로, 지모 탁월하나 주위 사람들과 갈등, 번민이 많고, 중도좌절운, 난관, 역경이 도처에 도사려져 있는 형국으로, 강한 책임감과 기상도 시류에 맞지 않거나 많은 배반자가 있어 일의 추진이 어렵게 되고 뜻을 이루지 못하게 되는 등 흉한 흐름임.

6. 사격

원격은 신성격(新成格)으로서 두뇌명석하고 온건한 성품으로 자력으로 집안을 일으키고 부귀안락할 대길수.

형격은 발전격(發展格)으로서 진취적인 의지를 바탕으로 예술에도 조예가 깊어 크게 발전하여 부귀영달에 이를 길수.

이격은 독립격(獨立格)으로서 심신이 강건하고 굳은 의지로서 자신의 뜻한 바를 관철하며 g후일 크게 발전할 길수.

정격은 발전격(發展格)으로서 진취적인 의지를 바탕으로 예술에도 조예가 깊어 크게 발전하여 부귀영달에 이를 길수.

7. 이름의 주기

주기에 관해서는 3년주기설, 5년주기설, 9년주기설등이 있으나, 전통적인 견해는 9년 주기설로서 이를 기준으로 판단해보면, 아래와 같은 흐름임.

<9세~17세>: 흉

<18세~26세>: 길
1548년(명종 3) 진사시에 합격하고, 19세에 금강산에 들어가 불교를 공부하다가, 다음해 하산하여 성리학에 전념하였다.
22세에 성주목사 노경린(盧慶麟)의 딸과 혼인하고, 다음해 예안의 도산(陶山)으로 이황(李滉)을 방문하였다. 그해 별시에서 <천도책(天道策)>을 지어 장원하고, 이 때부터 29세에 응시한 문과 전시(殿試)에 이르기까지 아홉 차례의 과거에 모두 장원하여 ‘구도장원공(九度壯元公)’이라 일컬어졌다.

<27세~35세>: 흉

<36세~44세>: 길
29세 때 임명된 호조좌랑을 시작으로 관직에 진출, 예조 ·이조의 좌랑 등의 육조 낭관직, 사간원정언 ·사헌부지평 등의 대간직, 홍문관교리 ·부제학 등의 옥당직, 승정원우부승지 등의 승지직 등을 역임하여 중앙관서의 청요직을 두루 거쳤다. 아울러 청주목사와 황해도관찰사를 맡아서 지방의 외직에 대한 경험까지 쌓는 동안, 자연스럽게 일선 정치에 대한 폭넓은 경험을 하였고, 이러한 정치적 식견과 왕의 두터운 신임을 바탕으로 40세 무렵 정국을 주도하는 인물로 부상하였다.

<45세~53세>: 흉
그러나 당시 산적한 현안을 그대로 좌시할 수 없어, 45세 때 대사간의 임명을 받아들여 복관하였다. 이후 호조 ·이조 ·형조 ·병조 판서 등 전보다 한층 비중 있는 직책을 맡으며, 평소 주장한 개혁안의 실시와 동인 ·서인 간의 갈등 해소에 적극적 노력을 기울였다. 이무렵 《기자실기(箕子實記)》와 《경연일기(經筵日記)》를 완성하였으며 왕에게 ‘시무육조(時務六條)’를 지어 바치는 한편 경연에서 ‘십만양병설’을 주장하였다. 그러나 이런 활발한 노력에도 불구하고 선조가 이이의 개혁안에 대해 계속 미온적인 태도를 취함에 따라 그가 주장한 개혁안은 별다른 성과를 거둘 수 없었으며, 동인 ·서인 간의 대립이 더욱 격화되면서 그도 점차 중립적인 입장을 유지할 수 없게 되었다.

그 때까지 중립적인 입장를 지키려고 노력한 그가 동인측에 의해 서인으로 지목되는 결과를 가져오고, 이어서 동인이 장악한 삼사(三司)의 강력한 탄핵이 뒤따르자 48세 때 관직을 버리고 율곡으로 돌아왔으며, 다음해 서울의 대사동(大寺洞) 집에서 죽었다.

-대승작명연구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