황희 黃喜 [1363~1452]


조선 초기 문신. 자는 구부(懼夫), 호는 방촌(尨村).

[음양(陰陽)] 陰 陰

[음오행(音五行)] 土 土

[자원오행(字源五行)] 土 水

[사격(四格)] 12 + 12

원격(元格): 12 → (凶) 박약격(薄弱格)

형격(亨格): 24 → (吉) 입신격(立身格)

이격(利格): 12 → (凶) 박약격(薄弱格)

정격(貞格): 24 → (吉) 입신격(立身格)

[총평]

1. 이름자의 의미

黃 누를 황
喜 기쁠 희

2. 음양의 배합

陰陰이니, 이는 음의 기운만으로 구성되어 자신의 주장만을 관철하여 극단적인 선택을 하여, 한쪽으로 치닫을 수 있는 배합으로서 성명학에서는 흉운의 음양배치임, 즉 음양이 모두 음이거나 또는 모두 양인 경우, 활동적이며 의지와 용기, 그리고 추진력이 강하나, 그 기운이 지나쳐 섬세하지 못하고 타인에 대한 배려가 없으며, 시작이 좋더라도 그 끝맺음이 좋지 못하여 결실이 없고, 중도에 포기하거나 좌절하는 경우가 많은 등 평생에 실패와 좌절이 많으며, 자손운이 좋지 않아 자손의 덕을 볼 수 없으며, 가정운과 부부운이 좋지 않아 고독한 말년을 보내는 경우가 많다.

3. 순천/역천격

성은 12획이고 이름 첫글자의 일자리수는 2획인 바, 이는 순천격으로서 순천격은 하늘의 순리에 따른다, 즉 법도, 관습등 일반적인 자연 이치의 흐름을 거역하지 않고, 그 뜻에 따라 순응하며 세상을 살아가는 유순한 성품.

4. 음오행

음오행은 "土 土"로서, 土의 오행은 어느 것과도 어울릴 수 있는 중성적 성질로서, 이 오행은 탁월한 지혜와 재능을 가지고 있으며, 추진력이 강하고 책임감이 강하여 안정된 기초운에 순조로운 가운데 성공의 운이 따르고, 처세가 원만하여 명예와 권위(權威)를 얻을 수 있다. 가정운에 있어서는 부부 일심동체(一心同體)로서 가세(家勢)가 중흥하며 대내외적으로 안락하고 부귀장수(富貴長壽)하는 길한 흐름.

5. 자원오행

자원오행은 "土 水"로서, 토극수, 즉 흙에 물을 부으면 물이 쉽게 사라지고 없어지듯이 상극하여, 일의 진행에 결실이 없으며, 중도난관, 배신 등의 흉이 잠재된 오행의 흐름.

6. 사격

원격과 이격은 박약격(薄弱格)으로서 의지력이 부족하여 일시적인 성공은 하더라도 전체적으로 일을 추진함에 난관이 많은 흉운.

형격과 정격은 입신격(立身格)으로서 비가 내린 후 꽃이 만개하듯, 점진적인 성공과 함께 자손은 번창하고 후일 부귀영화를 누릴 길수.

7. 이름에 쓰인 한자

喜자는 사람의 이름에 쓰면 그 뜻과는 반대로 흉하게 된다고 보는 불용문자에 해당함.

8. 이름의 주기

주기에 관해서는 3년주기설, 5년주기설, 9년주기설등이 있으나, 전통적인 견해는 9년 주기설로서 이를 기준으로 판단해보면, 아래와 같은 흐름임.

<6세~14세>: 흉

<15세~23세>: 길
1376년(우왕 2) 음보로 복안궁녹사(福安宮錄事)가 되었다가 1383년 진사시(進士試)에 합격, 1389년(창왕 1) 문과에 급제, 이듬해 성균관학관(成均館學官)이 되었다.

<24세~32세>: 흉
고려가 망하자 두문동에 은거함

<33세~41세>: 길
이성계(李成桂)의 간청으로 1394년(태조 3) 성균관학관으로 세자우정자(世子右正字)를 겸임, 그 후 직예문춘추관(直藝文春秋館) ·사헌감찰(司憲監察) ·우습유(右拾遺) ·경기도도사(京畿道都使)를 역임했다.

<42세~50세>: 흉
1404년(태종 4) 우사간대부(右司諫大夫)가 되었다가 이듬해 지신사(知申事)에 올랐으며, 1408년 민무휼(閔無恤) 등의 횡포를 제거, 그 후 형조 ·병조 ·예조 ·이조의 판서를 역임하였다.

<51세~59세>: 길
1418년 충녕대군(忠寧大君:世宗)이 세자로 책봉되자 이를 반대하여 서인(庶人)이 되고 교하(交河)로 유배, 다시 남원(南原)에 이배(移配)되었으나 1422년(세종 4) 풀려나와 좌참찬에 기용되고, 강원도 관찰사 ·예조판서 ·우의정 등을 역임하였다.

<60세~68세>: 흉
1427년 좌의정에 올랐고 1430년 투옥된 태석균(太石鈞)의 감형을 사사로이 사헌부에 부탁한 일로 탄핵을 받아 파직되었으나, 이듬해 복직, 영의정에 올랐다.

<69~77세>: 길
1449년 벼슬에서 물러날 때까지 18년간 영의정에 재임하면서 농사의 개량, 예법의 개정, 천첩(賤妾) 소생의 천역(賤役) 면제 등 업적을 남겨 세종의 가장 신임받는 재상으로 명성이 높았다.

<78세~86세>: 흉

<87세~95세>: 길

-대승작명연구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