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성계 李成桂 [1335~1408]
조선 제1대 왕(1392∼1398). 성은 이(李), 이름은 성계(成桂), 자는 중결(仲潔), 호는 송헌(松軒). 본관은 전주(全州).
[음양(陰陽)] 陽 陰 陰
[음오행(音五行)] 土 金 木
[자원오행(字源五行)] 木 火 木
[사격(四格)] 7 + 7 + 10
원격(元格): 17 → (吉) 용진격(勇進格)
형격(亨格): 14 → (吉) 이산격(移散格)
이격(利格): 17 → (吉) 용진격(勇進格)
정격(貞格): 24 → (吉) 입신격(立身格)
[총평]
1. 이름자의 의미
李 오얏 이(리)
成 이룰 성
桂 계수나무 계2. 음양의 배합
陽陽陰으로 음기와 양기간에 조화를 이루어 어느 한쪽에 치우치지 않으며, 중용의 도를 지키고, 안정된 삶속에 주위의 협조가 따라 뜻한 바를 이루는 등 길한 흐름의 배치.
3. 순천/역천격
성은 7획이고 이름 첫글자의 단자리수는 7획인 바, 이는 순천격으로서 순천격은 하늘의 순리에 따른다, 즉 법도, 관습등 일반적인 자연 이치의 흐름을 거역하지 않고, 그 뜻에 따라 순응하며 세상을 살아가는 유순한 성품.
4. 음오행
음오행은 "土金木"으로서, 土生金의 상생관계와 金剋土의 상극관계가 병존하는 반흉반길의 오행.
5. 자원오행
자원오행은 "木火木"으로서, 목생화 상생하여 총명하며 강한 의지력으로 뜻을 펼치게 되며, 그 뜻을 관철하여 대업을 달성하며, 널리 이름을 떨치고 사회적으로 많은 사람을 이끌 지위에 오르게 되는 길한 흐름.
6. 사격
원격은 용진격(勇進格)으로서 강한 의지와 추진력이 있어, 뜻한 바를 크게 이루고 후일 대업을 성취할 길수.
형격은 이산격(離散格)으로서 남에 대한 배려가 좋은 성품이나, 자신 스스로는 박약좌절하기 쉽고 번뇌가 많아 실패로 이어지고, 가정운이 좋지 못한 흉수로서 암울한 상태가 많은 흉수.
이격은 용진격(勇進格)으로서 강한 의지와 추진력이 있어, 뜻한 바를 크게 이루고 후일 대업을 성취할 길수.
정격은 공명격(功名格)으로서 활짝 핀 꽃이 만발하듯, 탁월한 이지를 바탕으로 일약출세하여 후일 만인추앙의 대상이 되는 영도적인물로 발전할 대길수.
7. 이름의 주기
주기에 관해서는 3년주기설, 5년주기설, 9년주기설등이 있으나, 전통적인 견해는 9년 주기설로서 이를 기준으로 판단해보면, 아래와 같은 흐름임.
<6세~14세>: 길
<15세~23세>: 흉
<24세~32세>: 길 : 1357년(공민왕 6) 유인우(柳仁雨)가 쌍성총관부를 공격할 때 이에 내응(內應)하여 공을 세웠고, 후에 아버지의 벼슬을 이어받아 금오위상장군(金吾衛上將軍) ·동북면상만호(東北面上萬戶)가 되었다.
1361년 반란을 일으킨 독로강만호(禿魯江萬戶) 박의(朴儀)를 토벌하였으며, 같은 해 홍건적(紅巾賊)의 침입으로 개경(開京)이 함락되자, 다음해 사병 2,000명을 거느리고 수도 탈환전에 참가하여 제1착으로 입성, 전공을 세움으로써 동북면병마사(東北面兵馬使)로 승진되고, 원(元)나라의 나하추[納哈出]가 함경도 홍원(洪原)으로 침입하자 함흥평야에서 이를 격파하였다. 1364년 원나라 연경(燕京)에 있던 최유(崔濡)가 충숙왕(忠肅王)의 아우 덕흥군(德興君)을 추대하고 1만 명의 군대로 평안도에 침입하여 공민왕을 폐하려 하자 최영(崔瑩)과 함께 이들을 달천강(악川江)에서 대파하고, 이어 여진족(女眞族)의 삼선(三善) ·삼개(三介)가 함경도 화주(和州)에 침입한 것을 격퇴하였다.<33세~41세>: 흉 : 1583년(선조 16) 건원보권관(乾原堡權管) ·훈련원 참군(訓鍊院參軍)을 지내고 1586년 사복시주부(司僕寺主簿)를 거쳐 조산보 만호(造山堡萬戶) 때는 호인(胡人)의 침입을 막지 못한 데 대해 정죄(定罪)하려 하자 그 원인이 첨병(添兵)을 거절한 데 있다 하여 자기의 정당성을 끝내 주장하다 중형은 면했으나 백의종군(白衣從軍)의 길에 올랐다.
<42세~50세>: 길 : 그 뒤 전라도관찰사 이광(李洸)에게 발탁되어 전라도의 조방장(助防將)이 되고, 1589년(선조 22) 선전관 ·정읍 현감(井邑縣監) 등 미관말직(微官末職)만을 지내다가 91년(선조 24) 유성룡(柳成龍)의 천거로 절충장군(折衝將軍) ·진도군수 등을 지내고 같은 해 전라좌도 수군절도사(全羅左道水軍節度使)에 승진, 좌수영(左水營:麗水)에 부임하여 군비 확충에 힘썼다.
이듬해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옥포(玉浦)에서 적선 30여 척을 격파하고 이어 사천(泗川)에서 거북선을 처음 사용, 적선 13척을 분쇄한 것을 비롯하여 당포(唐浦)에서 20척, 당항포(唐項浦)에서 100여 척을 각각 격파하여, 자헌대부(資憲大夫)에 승품(陞品)되고 7월 한산도(閑山島)에서 적선 70척을 무찔러 한산대첩(閑山大捷)의 큰 무공을 세웠다. 이어 정헌대부(正憲大夫)에 오르고 다시 가토 요시아키[加珙嘉明]의 수군을 안골포(安骨浦:창원군 웅천면)에서 격파하고 9월 적군의 근거지 부산에 쳐들어가 100여 척을 부수었다. 1593년(선조 26) 다시 부산과 웅천(熊川)의 적 수군을 격파, 남해안 일대의 적 수군을 완전히 일소하고 한산도로 진을 옮겨 본영(本營)으로 삼고 최초의 삼도수군통제사(三道水軍統制使)가 되었다. 이듬해 명나라 수군이 내원(來援)하자 죽도(竹島)에 진을 옮기고, 장문포(長門浦)에서 왜군을 격파, 적군의 후방을 교란하고 서해안으로 진출하려는 적을 막아 왜군의 작전에 큰 타격을 가하였고 전쟁이 소강상태에 접어들자 훈련을 강화하고 군비확충 ·난민구제 ·산업장려 등에 힘썼다.
<51세~59세>: 흉 : 1388년(우왕 14) 수문하시중(守門下侍中)에 올라 최영과 함께 권신(權臣) 임견미(林堅味) ·염흥방(廉興邦)을 처형, 이때 명(明)나라의 철령위(鐵領衛) 설치 문제로 요동정벌이 결정되자 출정을 반대했으나 거절당했다. 우군도통사(右軍都統使)가 되어 군사를 이끌고 북진하다가 위화도(威化島)에서 회군(回軍), 최영을 제거하고 우왕을 폐한 후 창왕(昌王)을 세웠으며, 자신은 수시중(守侍中)으로서 도총중외제군사(都摠中外諸軍事)가 되어 막강한 권력을 장악하였다. 다음해 정도전(鄭道傳) 등과 함께 창왕을 폐위하고 공양왕(恭讓王)을 세웠다. 1390년(공양왕 2) 삼사영사(三司領事)로 승진하였고, 1391년 삼군도총제사(三軍都摠制使)로서 조준(趙浚) 등과 함께 구신(舊臣)들의 반대를 물리치고 전제개혁(田制改革)을 단행하였다. 그 결과 구신들은 경제적 기반을 잃었고, 그의 일파인 신진세력은 경제적인 토대를 구축하게 되었다. 1392년(공양왕 4) 정몽주(鄭夢周)를 제거, 그 해 7월 공양왕을 양위시키고 스스로 새 왕조의 태조가 되었다.
<60세~68세>: 길 : 이듬해 국호를 조선(朝鮮)이라 정하고 1394년(태조 3) 서울을 한양(漢陽)으로 옮겼다. 1398년 제1차 왕자의 난이 일어나자 방과(芳果:定宗)에게 선위한 뒤 상왕(上王)이 되고, 1400년 방원(芳遠)이 즉위하자 태상왕이 되었다.
<69세~77세>: 흉 : 1402년 왕자들의 권력 다툼에서 빚어진 심뇌로 동북면에 가서 오랫동안 머물다가 돌아왔고 불가(佛家)에 귀의하여 여생을 보냈다.
-대승작명연구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