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순신 李舜臣 [1545~1598]


조선 중기 무신. 자는 여해(汝諧). 본관은 덕수(德水). 서울 건천동(乾川洞;지금의 中區 仁峴洞 부근) 출생. 거북선.

 

[음양(陰陽)] 陽 陰 陰

[음오행(音五行)] 土 金 金

[자원오행(字源五行)] 木 木 火

[사격(四格)] 7 + 12 + 6

원격(元格): 18 → 발전격(發展格)

형격(亨格): 19 → 고난격(苦難格)

이격(利格): 13 → 지모격(智謀格)

정격(貞格): 25 → 안전격(安全格)


[총평]


1. 이름자의 의미


李 오얏 이(리)
舜 순임금 순
臣 신하 신


2. 음양의 배합


陽陰陰으로 음기와 양기간에 조화를 이루어 어느 한쪽에 치우치지 않으며, 중용의 도를 지키고, 안정된 삶속에 주위의 협조가 따라 뜻한 바를 이루는 등 길한 흐름의 배치임.


3. 순천/역천격


성은 7획이고 이름 첫글자의 단자리수는 2획인 바, 이는 순천격으로서 순천격은 하늘의 순리에 따른다, 즉 법도, 관습등 일반적인 자연 이치의 흐름을 거역하지 않고, 그 뜻에 따라 순응하며 세상을 살아가는 유순한 성품을 지녔다고 볼 수 있다.


4. 음오행


음오행은 "土金金"으로서, 토생금의 상생관계가 호응을 이루는 매우 길한 오행으로, 지혜와 덕성을 겸비하고 있으며 원만한 대인관계와 강한 의지로서 일의 추진이 잘 이루어져 뜻한 일마다 성취, 발전하여 대업을 이루고, 널리 명예를 드높이는 형상. 심신이 강건하여 장수할 수 있으며, 가정운에 있어서도 부모의 덕속에 유복하게 성장하며 부부화목하여 백년해로하고, 자손 또한 영달하는 등 안정된 가정에 태평성대를 이룰 길한 흐름.


5. 자원오행


자원오행은 "木 木 火"로서, 목생화의 상생을 이루어 지혜, 활동성, 추진력, 리더쉽 등이 잘 발현되고 있으며, 주위의 신망이 두터워 뜻을 이루어 대업을 달성하며, 널리 이름을 떨치게 되는 길운.


6. 사격


원격은 발전격(發展格)으로서 지모로서 대외적으로 큰 발전을 이룰 길수. 지모와 노력으로 매진하여, 뜻한 바를 크게 이루며, 명예와 권위를 얻게 되는 길수.


형격은 고난격(苦難格)으로서 재능하 있어 학문에 성취함이 있으나 일시적임에 그치고 후일 중도좌절의 운이 있는 흉수.


이격은 지모격(智謀格)으로서 성명학에서는 특별히 길한 수로 취급하는 대길수로서, 지도적 선견지명이 있어 삼군의 참모도 당할 수 없을 교묘한 두뇌를 가져 어떤 일을 하더라도 크게 성취할 대길운.


정격은 안전격(安全格)으로서 평안한 삶과 함께 부귀 복덕의 운이 함께하는 길수.


7. 이름의 주기


주기에 관해서는 3년주기설, 5년주기설, 9년주기설등이 있으나, 일반적으로는 9년 주기설을 취하므로 9년주기설을 기준으로 평가해보면, 아래와 같은 흐름임.

<7세~15세>: 길


<16세~24세>: 흉


<25세~33세>: 길

1576년(선조 9) 식년무과(式年武科)에 병과(丙科)로 급제, 권지훈련원봉사(權知訓練院奉事)로 처음 관직에 나갔으며 이어 함경도의 동구비보권관(董仇非堡權管)에 보직, 이듬해 발포수군만호(鉢浦水軍萬戶)를 지냄.

 

<34세~42세>: 흉

1583년(선조 16) 건원보권관(乾原堡權管) ·훈련원 참군(訓鍊院參軍)을 지내고 1586년 사복시주부(司僕寺主簿)를 거쳐 조산보 만호(造山堡萬戶) 때는 호인(胡人)의 침입을 막지 못한 데 대해 정죄(定罪)하려 하자 그 원인이 첨병(添兵)을 거절한 데 있다 하여 자기의 정당성을 끝내 주장하다 중형은 면했으나 백의종군(白衣從軍)의 길에 올랐다.

 

<43세~51세>: 길

그 뒤 전라도관찰사 이광(李洸)에게 발탁되어 전라도의 조방장(助防將)이 되고, 1589년(선조 22) 선전관 ·정읍 현감(井邑縣監) 등 미관말직(微官末職)만을 지내다가 91년(선조 24) 유성룡(柳成龍)의 천거로 절충장군(折衝將軍) ·진도군수 등을 지내고 같은 해 전라좌도 수군절도사(全羅左道水軍節度使)에 승진, 좌수영(左水營:麗水)에 부임하여 군비 확충에 힘썼다.

이듬해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옥포(玉浦)에서 적선 30여 척을 격파하고 이어 사천(泗川)에서 거북선을 처음 사용, 적선 13척을 분쇄한 것을 비롯하여 당포(唐浦)에서 20척, 당항포(唐項浦)에서 100여 척을 각각 격파하여, 자헌대부(資憲大夫)에 승품(陞品)되고 7월 한산도(閑山島)에서 적선 70척을 무찔러 한산대첩(閑山大捷)의 큰 무공을 세웠다. 이어 정헌대부(正憲大夫)에 오르고 다시 가토 요시아키[加嘉明]의 수군을 안골포(安骨浦:창원군 웅천면)에서 격파하고 9월 적군의 근거지 부산에 쳐들어가 100여 척을 부수었다. 1593년(선조 26) 다시 부산과 웅천(熊川)의 적 수군을 격파, 남해안 일대의 적 수군을 완전히 일소하고 한산도로 진을 옮겨 본영(本營)으로 삼고 최초의 삼도수군통제사(三道水軍統制使)가 되었다. 이듬해 명나라 수군이 내원(來援)하자 죽도(竹島)에 진을 옮기고, 장문포(長門浦)에서 왜군을 격파, 적군의 후방을 교란하고 서해안으로 진출하려는 적을 막아 왜군의 작전에 큰 타격을 가하였고 전쟁이 소강상태에 접어들자 훈련을 강화하고 군비확충 ·난민구제 ·산업장려 등에 힘썼다.

 

<52세~60세>: 흉

1597년 원균(元均)의 모함으로 서울에 압송되어 사형을 받게 되었으나 우의정 정탁(鄭琢)의 변호로 도원수 권율(權慄)의 막하에서 두 번째 백의종군을 하였다.

정유재란(丁酉再亂) 때 원균이 참패하자 이순신은 삼도수군통제사에 재임명되어, 12척의 함선과 빈약한 병력을 거느리고 명량(鳴梁)에서 133척의 적군과 대결, 31척을 부수었다. 다음해 고금도(古今島)로 진을 옮겨 철수하는 적선 500여 척이 노량(露梁)에 집결하자 명나라 제독 진인(陳璘)의 수군과 연합작전을 펴, 적군을 기습하여 혼전(混戰)중 유탄에 맞아 전사하였다.

-대승작명연구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