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문수 朴文秀 [1691~1756]



조선 후기의 문신. 자는 성보(成甫), 호는 기은(耆隱). 본관은 고령(高靈). 어사 박문수.

 

[음양(陰陽)] 陰 陰 陽

[음오행(音五行)] 水 水 金

[자원오행(字源五行)] 木 木 木

[사격(四格)] 6 + 4 + 7

 

원격(元格): 11 → 신성격(新成格)


형격(亨格): 10 → 공허격(空虛格)


이격(利格): 13 → 지모격(智謀格)


정격(貞格): 17 → 건창격(健暢格)

 

[총평]

 

1. 이름자의 의미

 

朴 후박나무 박
文 글월 문
秀 빼어날 수

 

2. 음양의 배합

 

陰陰陽으로 음기와 양기간에 조화를 이루어 어느 한쪽에 치우치지 않으며, 중용의 도를 지키고, 안정된 삶속에 주위의 협조가 따라 뜻한 바를 이루는 등 길한 흐름의 배치임.

 

3. 순천/역천격

 

성은 6획이고 이름 첫글자의 단자리수는 4획인 바, 이는 순천격으로서 순천격은 하늘의 순리에 따른다, 즉 법도, 관습등 일반적인 자연 이치의 흐름을 거역하지 않고, 그 뜻에 따라 순응하며 세상을 살아가는 유순한 성품을 지녔다고 볼 수 있다.

 

4. 음오행

 

음오행은 "水水金"으로서, 금생수의 상생관계가 호응을 이루어 매우 길한 소리오행임. 즉 이와 같은 오행은 두뇌명석하며 성실하여 노력이 뒷받침되고, 안정된 기초운으로 매사에 순조로운 가운데 성취, 발전하여 부귀공명을 얻게 되어 사회적으로 상당한 지위에 오르며, 많은 사람의 신망의 대상이 되는 길운의 흐름. 가정적으로도 부부화목하여 복운(福運)이 가득하고 가세(家勢)가 증흥하는 길운.

 

5. 자원오행

 

자원오행은 "木木木"으로서, 木의 기운으로 모두 채워진 오행 구성으로 이와 같은 오행은 좋은 흐름을 타는 것으로 평가됨. 즉 강한 활동성에 지적이며, 추진력도 있어 뜻한 바의 일을 강고히 추진하여 대업을 달성하고 부귀공명을 누리게 되며, 안정된 가정운으로 천복을 누리고 가운(家運)이 대대로 발달하는 길한 흐름.

 

6. 사격

 

원격은 신성격(新成格)으로서 조상의 은덕이 있어 고생을 모르고 지낼 수. 천성이 근면 성실하고 원만하여 대인관계가 좋고, 자신으로 인해 자신과 가운을 일으킬 수 있는 길운. 명석한 두뇌에 이지적인 사고력과 진취적인 기상은 소기의 목적을 위해 매진하여, 뜻한 바 목적 달성은 물론 사회적으로 상당한 명예와 권위를 얻어 부귀, 안락할 운.

형격은 공허격(空虛格)으로서 다재다능하여 모든 일을 계획성 있게 잘 도모하나 나태하고 우유부단한 면이 있어 흉함. 가족 또는 동료, 선후배의 인연이 박하여 객지를 떠돌아다니며 수심과 고독으로 세월을 보내며, 처자와의 이별, 질병, 조난, 중년요절, 형액 등의 불운이 따르기도 하는 흉수. 그러나 이 수가 두 곳에 겹쳐 있으면서 전체가 양호한 경우, 대부, 대귀의 길운이 될 수도 있음.

이격은 지모격(智謀格)으로서 성명학에서는 특별히 길한 수로 취급하는 대길수로서, 지도적 선견지명이 있어 삼군의 참모도 당할 수 없을 교묘한 두뇌를 가져 어떤 일을 하더라도 크게 성취할 대길운.

정격은 건창격(健暢格)으로서 적극적이고 강인한 의지를 가진 성품이며 권력 지향적인 활동성이 있음. 어떠한 어려움이 있더라도 이에 굴하지 않고 자립 대성하여 중인의 존경을 받게된다는 의미. 다만 이와 같은 성품으로 인해 자신을 과신하는 경향이 있으며, 타인과의 조화 및 자기성찰이 이루어지면 매우 길하게 된다.

7. 이름의 주기

 

주기에 관해서는 3년주기설, 5년주기설, 9년주기설등이 있으나, 일반적으로는 9년 주기설을 취하므로 9년주기설을 기준으로 평가해보면, 아래와 같은 흐름임.

 

<8세~16세>: 길

 

<17세~25세>: 흉

 

<26세~34세>: 길 1723년(경종 3)(33세) 증광문과에 급제, 사관(史官)이 되었다. 1724년(34세) 병조정랑(兵曹正郞)에 올랐다가 노론(老論)이 집권하자 삭직당했다.

 

<35세~43세>: 흉 1727년 정미환국(丁未換局)으로 소론(少論)이 득세하자 사서(司書)에 등용되어 영남 암행어사로 나가 부정관리들을 적발했다. 이듬해 이인좌(李麟佐)의 난 때는 종사관(從事官)으로 출전, 전공을 세워 경상도 관찰사에 발탁되고, 분무공신(奮武功臣) 2등에 책록되어 영성군(靈城君)에 봉해졌다. 1730년 호서어사(湖西御史)로 기민(飢民) 구제에 힘썼으며, 1734년 진주부사(陳奏副使)로 청나라에 다녀온 뒤 병조판서 등을 지냈다. 1738년 다시 동지사(冬至使)로 청나라에 다녀온 뒤, 앞서 안동서원(安東書院)을 철폐시킨 일로 탄핵을 받아 풍덕부사(豊德府使)로 좌천되었다.

 

<44세~52세>: 길 1749년 호조판서가 되어 양역(良役)의 폐해를 논하다가 다시 충주목사(忠州牧使)로 좌천되었다. 그 뒤 영남균세사(嶺南均稅使) 등을 거쳐 세손사부(世孫師傅)를 지내고, 1752년 왕세손(王世孫:踵)이 죽자 약방제조(藥房提調)로서 책임을 추궁당해 제주(濟州)에 안치, 이듬해 풀려나 우참찬(右參贊)이 되었다.

 

<53세~61세>: 흉 56세 사망.

-대승작명연구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