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봉길 尹奉吉 [1908~1932.12.19]


독립운동가. 본명은 우의(禹儀). 충청남도 예산(禮山) 출생.

[음양(陰陽)] 陰 陰 陰

[음오행(音五行)] 土 水 木

[자원오행(字源五行)] 水 木 水

[사격(四格)] 4 + 8 + 6

원격(元格): 14 → 이산격(離散格)

형격(亨格): 12 → 박약격(薄弱格)

이격(利格): 10 → 공허격(空虛格)

정격(貞格): 18 → 발전격(發展格)

[총평]

1. 이름자의 의미

尹 다스릴 윤
奉 받들 봉
吉 길할 길

2. 음양의 배합

모두 음이어서 강한 한쪽의 기운을 가지고 있다. 윤봉길 의사의 극렬한 항일 투쟁의 면을 읽을 수 있다. 다만 음양이 모두 음이거나 또는 모두 양인 경우 강한 의지와 활동력을 가지고 있으나, 시작이 좋더라도 끝이 없으며 중도에 포기하거나 좌절하는 경우가 많은 등 평생에 실패와 좌절이 많으며, 자손을 두기가 어렵고, 자손이 있다 하여도 덕을 볼 수 없으며, 가정운과 부부운이 좋지 않아 고독한 말년을 보내는 경우가 많다.

3. 순천/역천격

성은 4획이고 이름 첫글자의 일자리수는 8획인 바, 이는 역천격으로서 과거 정적인 사회에서는 순천격을 좋은 것으로 평가하였으나, 동적인 현대사회, 특히 격동했던 한말의 상황에서는 오히려 역천격의 이름이 큰 일을 해낼 이름으로 평가됨.

4. 음오행

음오행이 土水木으로 구성되어 있으니, 이는 수극토와 수생목의 상극, 상생이 함께 존재하는 반흉반길의 음오행의 흐름.

5. 자원오행

자원오행은 水木水로 구성되어 있으니, 이는 수생목, 즉 나무가 물을 받아 자라나는 형상으로 상생하여 순조로운 가운데 뜻한 바를 이루고, 널리 이름을 떨치게 되는 길한 흐름.

6. 사격

원격: 14 → 이산격(離散格) 부모형제 이별수 있으며 혹 어려운고비를 돌파한 연후에 대성대귀하는 사람도 있다. 빗속에 어두운 밤길을 가는 형세

형격: 12 → 박약격(薄弱格) 성질이 급하여 매사에 서두르다가 당황하여 실패하는 모양. 경쟁심이나 투지는 좋으나 뜻을 이루지 못하고 고생과 좌절을 맛보게 되는 형국.

이격: 10 → 공허격(空虛格) 만사 곤란이 있으나 처자와 이별 또는 질병등으로 고생하며 단명하기 까지의 불행을 겪게되는일이 있다. 구름이 명월을 가리는 운

정격: 18 → 발전격(發展格) 초년은 고생하나 그후 발전으로 부귀쌍전하여 명진사해하고 자손에 공명이 있는 길수

7. 이름에 쓰인 한자

이름에 쓰인 한자 吉자는 그 뜻과는 반대로 흉하게 된다고 보는 불용문자에 해당함. 이름에 이 글자를 쓰면 난관, 역경, 풍파, 빈천, 객지고생 등의 흉한 암시가 있는 한자임.

8. 이름의 주기

주기에 관해서는 3년주기설, 5년주기설, 9년주기설등이 있으나, 일반적으로는 9년 주기설을 취하므로 9년주기설을 기준으로 평가해보면, 아래와 같은 흐름임.

<9세~17세>: 길: 1918년 덕산(德山)보통학교에 입학하였으나 3·1운동이 일어나자 민족의 비운을 느끼고 자퇴, 성주록(成周錄)이 개설한 오치서숙(烏峙書塾)에서 한문을 수학.

<18세~26세>: 흉: 1928년 부흥원(復興院), 1929년 월진회(月進會)를 조직하는 등 농촌계몽운동에 앞장섰으나 일제의 탄압을 받자, 1930년 2월 만주로 망명. 1931년 상하이에서 김구(金九)가 주도하는 한인애국단에 가입.

1932년 김구로부터 지시를 받고 4월 29일 일왕의 생일인 천장절(天長節) 및 상하이사변 전승기념식이 열리는 훙커우공원[虹口公園]에 들어가 폭탄을 던져 일본 상하이파견군 대장 시라카와[白川義則]와 상하이 일본거류민단장 가와바타[河端貞次] 등을 즉사시키고, 일본 제3함대 사령관 노무라[野村吉三郞], 제9사단장 우에다[植田謙吉], 주중(駐中)일본공사 시게마쓰[重光葵] 등에게 중상을 입혔다. 거사 직후 현장에서 체포되어 5월 25일 상하이파견군 사령부 군법회의 예심에서 오사카[大阪]로 이송, 12월 18일 가나자와[金澤] 형무소로 옮겨져 19일 총살되었다. 1962년 건국훈장 대한민국장이 추서되었다.

7. 이름자를 보면 윤봉길의사의 어려웠던 시절에 있어서 불의에 굽힘이 없는 강한 정신력이 있는 성품이어서 이와 같은 위업을 달성하신 점이 연결된다고 볼 수 있다. 다만 항일 투쟁과정에 있어서의 윤봉길의사의 힘들었던 과정이 읽혀지기도 한다. 결국 윤봉길 의사 본인은 희생하며, 구국을 하였고, 이것이 후대에 만고의 위업으로 길이 빛난다 할 수 있다.

-대승작명연구소-